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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과 만해 -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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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페이스북 박준성선생님 

(페북에 제목이 없는 관계로 이 글의 제목은 옮긴이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며칠 동안 조계종 조계사와 '자승'과 '도법'의 행태를 보면서 일제 강점기 '만공'과 '만해'가 떠올랐다. 지금도 만공과 만해 같은 스님 없을까마는.....

 

ㅇ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

 

예산 수덕사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시대 나무로 지은 대웅전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절로 유명하다. 그 뿐 아니라 근대 선풍을 일으킨 경허와 만공 스님의 활동무대이기도 하였다.

수덕사 뒷산 덕숭산에 만공 스님의 사리 무덤인 ‘만공탑’이 있다. 만공이 1946년 76세로 입전한 뒤 제자인 박중은 선사가 설계하여 1947년 세운 우리나라 처음의 현대식 부도이다. 불교의 팔정도를 상징하는 팔각받침대 위에 불.법.승 삼보를 뜻하는 삼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법호인 만공(萬空)과 법명인 월면(月面)을 상징하는 둥근 공모양의 몸돌을 올려 놓았다. 전체로는 앉아서 참선하는 모습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크기도 우람하지 않아 보기에 아담하다. 탑 이름도 한글로 '만공탑'이라고 써서 친근하게 느껴진다.

만공탑 뒤에는 가로로 ‘세계일화(世界一花)’와 세로로 ‘백초시불모(百草是佛母),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이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은 내가 강의를 마무리 할 때마다 마무리로 인용하는 구절이다. “천번 생각하는 것이 한 번 행동함만 같지 못하다” “천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 번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만공에 대해서는 이름만 아는 정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작은책 ‘시대를 빛낸 문화 예술가’ 특집을 기회 삼아 만공에 대해 공부해 보자고 욕심을 냈다. 만공과 짝으로는 어렵지 않게 만해 한용운을 꼽았다.

만해도 "만일 좋은 이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천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좋은 씨앗이 있으면서도 심지 않고 봉지에 넣어 매달아 두는 것과 같다."고 실천의 중요성을 깨우쳤다. 만공과 만해에게 ‘천사(千思)’는 무엇이었고 ‘일행(一行)’은 무엇이었을까?.

 

ㅇ 만공과 만해 관계

 

1937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조선 13도 도지사들과 조선불교 31본산 주지들이 참가하였다. 공주 마곡사 주지였던 만공도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미나미 총독이 일본의 도움으로 승려들이 도성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초대총독이었던 데라우치 총독이 사찰령을 선포하고 은혜를 베풀었다면서 조선불교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일본불교와 조선불교가 통합하여 진흥책을 수립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려 들었다. 친일 주지들이 아부를 하며 맞장구를 칠 때 만공스님이 일어서 소리를 쳤다.

“청정이 본연커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전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는 우리 조선 불교를 망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전 승려로 하여금 일본 불교를 본받게 하여 대처.음주.식육을 마음대로 하게 하여 부처님의 계율을 파계한 불교에 큰 죄악을 입힌 사람이다. 이 사람은 마땅히 무간아비지옥(無間阿鼻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이 고통을 받아야 함이 당연한데 어찌하여 공이 크다고 하는가. 우리 조선 불교는 일천오백 년 역사를 가지고 그 수행 정법과 교화의 방편이 여법하거는 일본불교와 합하여 잘될 필요가 없으며, 정부에서 간섭을 하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하는 것이 옳다.”

회의는 어수선하게 끝났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만공은 선학원으로 가서 만해를 만났다.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만해가

"잘했다. 사자후여! 한 번 할을 하매 그들의 간담이 떨어지게 하였구나. 비록 한 번 할을 한 것도 좋기는 하지만, 방망이를 휘둘러 때려주고 나오는 것이 더 좋지 않은가?."

하거늘 만공이 크게 웃으며 대꾸를 했다.

"차나 한잔 드세, 어리석은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영리한 사자는 할을 쓰느니”

만공은 사자가 되고 만해는 곰이 되어 버린 꼴이다. 만공 쪽 이야기는 주로 여기서 끝난다. 그런데 만해 쪽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만해가 즉각 이렇게 응대하였다고 한다.

"새끼 사자는 호령을 하지만 큰 사자는 그림자만 보이는 법이지..."

만공은 새끼 사자가 되고 만해는 큰 사자가 되어버린 셈인데, 누가 사자이고 누가 곰이며, 누가 새끼 사자이고 누가 큰 사자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일화 속에는 당대 두 고승의 막힘없는 관계와 조선 불교의 현실 담겨 있다.

만해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31본산 주지회의의 요청에 따라 강연을 간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만해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묻고는 “제일 더러운 것을 똥이라 하겠지요.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송장 썩는 것이 똥보다 더 더럽더군요. 그런데 송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그건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하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만공은 1935년부터 1938년 사이 주지를 지냈다. 이때는 우가키 총독의 ‘심전개발운동’과 미나미 총독의 황민화 정책이 본격화 되던 시기였으며, 조선불교 31 본사 주지들이 대부분 일본의 불교 정책에 동조하던 시기였다. 그 무렵 만공은 31 본산 주지 회의를 틈타 총독을 죽이려고 몰래 칼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만해는 “이제 그놈들도 끝장이야. 얼마 안가서 연합군에 항복하고 말거요. 그때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형을 받을 것이니 이제 죽을 날 받아놓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면서 칼을 빼앗았다고 한다.

만공은 미나미 총독 앞에서는 대처를 인정한 데라우치 총독이 무간아비지옥에서 떨어졌을 거라면서 일제 총독부의 조선 불교 정책을 비판하였으나, 일찍이 만해가 1910년대 <조선불교유신론>을 써서 ‘승려 대처론’을 주장하고, 1933년 55살 때 36살 된 간호원 유숙원과 재혼하였어도 서울에 오면 심우장을 찾곤 했다.

만해도 만공의 현실에 대한 대응과 실천은 좀 어설퍼 보였어도 경허 스님의 제자로 조선불교의 중흥조였으며, 일본의 불교정책에 맞서 비타협으로 승려생활을 하고 있던 만공을 존경하여 덕숭산을 찾곤 하였다.

만해의 따님인 한영숙은 두 사람의 각별한 관계를 “송만공 스님 같은 분들께서 오시면 약주상을 가운데 두고 허심탄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지새우며 환담을 나누시던 일들이 환히 떠오릅니다”하였다.

만공은 1942년 스승인 경허스님의 문집인 <<경허집>>을 만들면서 만해에게 서문을, 그리고 방한암 스님에게는 행장기를 쓰게 하였다. 만해는 서문에서 “경허 스님은 육신을 초탈해 작은 일에 걸리지 않고 마음대로 자재하며 유유자적했다”썼다.

만공은 늘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귀한 데 꼭 하나와 반이 있다”고 하였다. 그 하나는 바로 만해를 가리키는데 반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만해가 돌아간 뒤 만공은 이제 서울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만공은 1871년 3월 7일 전라북도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여산 송씨이고 속가의 이름은 도암(道岩), 법명은 월면(月面),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1946년 10월 20일 입적하였다. 세상 나이 75세, 법랍(중의 나이) 62년이었다.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청주 한씨이고 속가의 이름은 유천,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1944년 6월 29일 입적하였다. 세상나이 66, 법랍 39였다.

둘 사이의 나이 차이는 만공이 만해보다 8살 위였으나 서로 아끼고 막힘없는 사이였다. 서로 동지이며 도반이었지만 실천 방법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만공은 현실정토의 근원으로서 참선을 통한 ‘마음 정토’를 중시한데 비해 만해는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실천함으로서 현실정토를 이루고자 하였다.

 

ㅇ 만공의 삶과 실천

 

만공은 열세 살 되던 해(1883년) 겨울 절에서 설을 쇠면서 불상과 승려를 보고온 뒤부터 간절하게 출가할 마음이 생겼다. 어느 날 밤에 집을 나와 전주 봉서사로 가서 며칠 묵었다. 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전주 송광사를 찾았으나 스님들은 “이곳에는 훌륭한 스님이 없으니 논산 쌍계사에 계신 진암(眞岩) 노스님을 찾아가라”고 일러 주었다. 진암은 이미 계룡산 동학사로 거처를 옮긴 뒤였다.

만공은 나이 열네 살 되던 1884년에 동학사로 가서 진암을 모시고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해 10월 초순에 충청도 서산 천장암에서 경허(鏡虛)가 동학사에 왔다. 훗날 사람들이 경허하면 만공을, 만공하면 경허를 떠 올릴 만큼 근대 불교의 거봉을 이룬 두 사람이 동학사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진암은 경허에게 만공을 거두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만공이 처음에는 경허에게 가기를 꺼려했다. 경허의 법문 “삐뚤어진 나무는 삐뚤어진 나무대로 쓸모가 있고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쓸모가 있으니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다 귀하고 소중한 것, 부처님 아님이 없고 관세음보살 아님이 없는 것이오!”를 듣고 배우기를 요청하였다. 경허는 만공을 충남 천장암에 있는 태허 스님에게 보냈다. 태허는 경허의 친형이기도 했다. 1884년 12월 8일 만공은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 스님을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이 월면(月面)이었다.

그때 천장암에서는 서른 살 수월(水月), 스무 세 살 혜월(慧月), 열네 살 월면(월면, 뒤의 만공)이 경허에게 불법을 배웠다. 이들을 3월이라고 하며 훗날 경허의 3대 제자로 불리게 된다.

천장암에서 10년을 머물러 스물 세 살이 되던 1893년 11월에 17,8세 되는 소년이 만공에게 만법귀일(萬法歸一)하니 일귀하처(一歸何處)오“가 무슨 뜻인지 물었다. 만공는 며칠 동안 밤을 새워가며 “ 만 가지 법이 다 하나로 돌아가니 한 가지 돌아가는 곳이 과연 어디인가”를 깨치려고 고민하다가 몰래 천장암을 떠났다.

온양 봉곡사로 가서 공부를 계속하던 1895년(25세) 7월 25일, 마주 보던 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면서 찬란한 빛과 함께 큰 일원상 하나가 월면의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은 기쁨을 나누려고 사람마다 붙잡고 함께 공부하자고 권했으나 밤새 미쳤냐고 비웃음만 당하자 지리산 청학동을 향해 떠났다. 전라도 장성 지방에서 의병 부대에 막혀 돌아오던 중 공주 마곡사에 들렸다가 보경 스님의 배려로 토굴에서 공부를 하였다. 1896년 7월 경허가 찾아 왔다. 경허가 만공에게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는 진보가 없으니 조주(趙州) 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드는 것이 옳겠다 하고 떠났다.

1898년 7월 만공은 경허가 있는 서산 도비산 부석사로 갔다. 그 무렵 경남 동래 범어사 계명암 선원에서 경허를 초청하였다. 경허를 모시고 갔던 만공은 계명 선원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경허와 떨어져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장마 때여서 보름 동안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다가 다시 깨달았다. 두 번째 깨달음이었다.

무자화두를 들고 자신과 싸움을 끝낸 만공은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다가 서른 한 살 때인 1901년 7월 천장사암으로 돌아왔다. 스물 세 살 때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화두에 막혀 천장암을 떠난 지 8년만이다. 서른네 살 때인 1904년 7월 경허가 함경도 갑산으로 가는 길에 천장사에 들려 전법게와 함께 가득할 만(滿)자 빌 공(空)자 만공이란 법호를 내려주었다.

경허가 떠난 뒤 만공도 이곳저곳 산천을 떠돌다가 1905년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에 조그마한 띠집을 짓고 이름을 금선대라고 붙였다. 납자들의 청에 따라 설법을 열었다.

만공은 참선 공부의 3대 요건으로 도사(道師), 도량(道場), 도반(道伴)을 꼽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참 스승인 도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만공은 경허 같은 스승과 덕숭산 정혜사, 수덕사 같은 도량, 수월, 혜월, 한암, 용성, 만해 같은 도반을 두었으니 참선 공부의 3대 요건을 고루 갖추었언 것이다.

만공은 서산 간월도 간월암과 덕숭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였다. 금강산 유점사 마하연에서도 3년을 보냈다. 만공은 정혜사에 머물면서 보월, 석영, 연등, 고봉, 금봉, 벽초, 초부, 용음, 혜암, 진성(원담)을 불교계의 거목으로 키워내었다. 견성암에서는 뒤에 <<내 청춘을 불사르고>>를 쓴 ‘신여성’ 김원주가 머리를 깎고 ‘일엽’으로 거듭났고, 법희, 선복 같은 뛰어난 비구니 스님들이 법그릇을 키워 나갔다.

만공의 법문 가운데 내가 재미있께 떠올리는 것이 딱따구리 법문이다. 1930년대 말경 만공을 찾아온 옛 조선 왕실의 상궁과 나인들 앞에서 어린 시봉이 ‘딱따구리 노래’를 불렀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듣는 사람들이 얼굴이 시뻘개졌다. 만공은 범부 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이 땅에 태어난 원래 뚫린 부처 씨앗인데,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 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이라고 하였다.

만공은 실천의 방식이 만해와는 달랐다. 그 역시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자긍심이 대단했고 빼앗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다. 그런데 방도는 자신부터 찾아야 하다는 것이었다. 덕산에 사는 노인에게 한 이야기 한 대목이다.

“덕산 사람은 덕산을 찾아야 되고 조선 사람은 조선을 찾아야 하오, 덕산 사람이 덕산을 찾지 못하면 덕산 사람이 아니고, 조선 사람이 조선을 찾지 않으면 조선 사람이 아니오. 당신이 끝까지 당신을 찾아야만이 진정코 옳은 사람이 될 것이오.”

1941년 3월 10일 서울 선학원에서 열린 고승대회에 참석하여서는 일본의 식민지 불교정책에 항거하여 조선 전통불교를 굳게 지킬 것을 선언하였다. 미나니 총독이 만공을 회유하려고 충청도 도지사를 앞세워 일본 유람을 권유할 때는 호통을 치면서 거절하였다.

“나라 잃은 백성은 이미 송장이거늘 송장을 데려다가 일본 천지를 돌아다니면서 ‘저 자들이 바로 조선 송장들이다’하고 구경이나 시키자는 것인데, 내 어찌 그런 망신을 당하려고 일본엘 가겠는가”

만공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만행을 인류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상정하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것과 같고, 자기가 자신을 부정하는 모순으로 인식하였다.

“지구라는 한 모태에서 같이 출생한 동포가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되니 어느 형을 찌르려고 칼을 갈며 어느 아우를 죽이려고 총을 만드는지 비참한 일이니라”

만공은 말년에 덕숭산 동편 위쪽에 띠집을 지어 전월사라 이름을 짓고 지냈다. 1946년 10월 20일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모습을 보면서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는 입적하였다.

 

ㅇ 만해의 삶과 실천

 

만공이나 만해나 삶과 실천에서 중심에는 불교가 있었다. 만공의 출가도 가출에서 시작되었지만 불심이 이끄는 대로 무난하게 이루어진 데 반해 만해의 출가는 가출 - 방랑 - 출가 - 방랑 - 정신적 수행 생활이라는 복잡한 경로와 방황 끝에 이루어졌다.

최근의 연구들은 만해의 아버지 한응준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농민군 토벌대로 참가하여 농민군을 학살하는 편에 섰었다고 밝히며, 이것이 만해의 방황과 가출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만해의 삶과 실천이 한 점 흠 없이, 흔들림 없이 오로지 꼿꼿하게 일관된 것만은 아니었다. 1910년(32세) 경술국치를 당하던 해 9월에 만해는 통감 데라우치 마시다케(寺內正毅)에게 승려의 결혼 금지 해제를 요청하는 ‘통감부 건백서’를 보냈다. 친구인 박한영이 “만해가 미쳤나”할 정도로 일생의 큰 ‘실책’을 범한 것이다.

1919년 감옥에서 쓴 <조선독립이유서>에서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앞장서서 승인’하면 조선인은 일본인에 대하여 가졌던 합방의 원한을 잊고 깊은 감사를 표할 것이라거나, 일본이 ‘동양 평화의 맹주’가 되기 위해 우선 ‘조선의 독립을 앞장서서 승인’하리라 믿는다고 하여 일제의 식민지 통치 본질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 1930년 새로운 신간회 집행부가 우경화 경향을 보이면서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해소론’이 제기될 때 만해는 해소를 반대하는 하는 편이었다.

만해는 청년기 때 1906년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 <<영환지략>>보고 서구의 문명과 실태를 간접 경험한 뒤, 1907년 6개월 동안 일본을 여행하면서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문물을 경험하고 일본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였다.

새롭게 경험한 근대, 그러한 근대의 주체가 식민지 본국이 된 데 따른 충격과 혼돈, 3.1운동과 신간회 운동의 실패에 따른 좌절의 아픔, 식민지 지배하에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곤궁한 생활. 그의 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불교가 그를 더욱 갈등과 고뇌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만해는, 흔들리는 나침반만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고, 팽이는 계속 돌아야 서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흔들리고, 수 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시대와 불화하면서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듯 온 몸과 마음을 불태우는 삶을 살았다.

1892년 14살 때 고향에서 천안 전씨 전정숙과 결혼하였고, 1904년 12월 21일 맏아들 보국이 태어났다. 고향을 떠나 온 뒤 3.1운동 이후 아들 보국이 찾아와 만난 적이 있지만 다시 헤어져 살았다. 해방 뒤 보국은 충남 홍성군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과 군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6·25전쟁 때 월북했다가 사망했다.

1904년, 나이 26세 되던 해 집을 나서 1905년(27세) 1월 26일 백담사에서 연곡 스님을 은사로, 영제(永濟) 스님에게 계를 받았다.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이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였다.

1907년에 건봉사에서 선수업을 하고, 1908년에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월화 스님에게 <<화엄경>>을, 건봉사 학암 스님에게 <<반야경>>과 <<화엄경>>을 배웠다.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 원고 쓰기를 마쳤는데, 1913년에 불교서관에서 책으로 냈다.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만해는 불교의 특징은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라고 강조하면서 폐단이 극도에 이른 조선 불교는 개량이 아니라 파괴의 대상이라고 주장하였다. 낡고 부패한 무리들이 젊은이들의 신교육을 방해하고 있고, 참선인들이 참선한다고 앉아서 옛 조사들의 어록 몇 마디를 수작하며 원숭이의 잠으로 아까운 청춘을 다 보내고 있으며, 큰소리치며 호불하는 것이 왕색극락하는 염불인 것처럼 꾸미고, 의식 절차가 번잡하며 쓸데없는 탱화와 조상들이 많다고 비판한다.

사원은 산속에서 도시로 내려와 열성과 인내 그리고 자애를 바탕으로 포교에 힘써야 하며, 승려들이 사취와 걸식 같은 의존적 생활을 벗어나 자기 노동으로 생산하며 독립생활 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승려들이 독신생활을 하면 윤리, 종족 번식, 포교, 풍습에 해롭기 때문에 승려는 결혼을 해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주지는 선거 제도에 의하여 공명하게 선출해야 하고, 독선적 이기주의에 빠져 방관하는 자세를 벗어나 단체사상을 가져야 하며, 전체 불교 사원과 재산을 통괄하는 조직과 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조선불교유신론은 1910년대 쓴 뛰어난 논문이었지만, 불교 교리 사상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고, 불교 교단이 역대 왕조와 야합하여 폐단이 컸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으며, 일제 통감부의 힘을 빌려 승려의 독신 생활을 막으려 했고, 일제의 ‘사찰령’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정치적 침략과 불교 침투에 대해 무감각했다는 점에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12년부터 일반 대중에게 불교 교리를 널리 알리려고 ≪불교대전≫ 편찬을 기획하여 1914년 범어사에서 간행하였다. 불교 대전은 출간한지 얼마 안 되어 수천 부가 팔릴 정도로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17년 12월 3일 밤 설악산 오세암에서 좌선을 하던 중, 1907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를 이룬 이래 10여년 만에,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백용성(白龍城)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3.1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만해는 ‘독립청원’을 반대하고 완강하게 ‘독립선언’을 주장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썼는데, 끝에 있는 공약삼장도 최남선이 썼다는 주장과 만해가 덧붙여 썼다는 주장이 맞부닥치고 있다. 만해가 썼다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독립선언서에 서명도 하지 않은 최남선이 공약 3장 가운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같은 행동 강령을 쓸 수 있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만해는 구속되면서 1. 변호사를 대지 말 것, 2.사식을 들이지 말 것, 3.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이라는 3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이를 지켰다.

1919년 7월 만해는 서대문감옥에서 ‘조선독립의 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로 불리는 ‘조선독립이유서’를 썼다. 여기에서 만해는 인류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가장 흉악한 마술인 군국주의와 침략주의는 멸망할 것이며, 조선인은 당당한 독립 국민의 역사와 전통이 있을 뿐 아니라 현대 문명을 함께 나눌 만한 실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민족의 독립 자결은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것이요, 동양 평화에서도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인데, 만일 일본이 침략주의를 여전히 계속하여 조선의 독립을 부인하면, 이는 동양과 세계 평화를 교란하는 일로서 세계 연합 전쟁을 유발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1925년(47세) 8월 29일 설악산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고, 1926년 책으로 발행하였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님의 침묵’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로 시작하여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로 끝난다. 만해에게 떠나 갔지만 보내지 않은 님의 실체는 무엇일까. 시를 읽는 독자들이 떠올리는 님은 또 무엇일까. 님은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시대와 상황과 인식에 따라 달라 질 것이다.

1927년 일제와 비타협을 원칙으로 민족의 반일 역량을 총 결집한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체인 신간회를 결성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2월 15일 창립 총회 뒤 만해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을 맡았다. 8월에 경성지회장을 그만 두었다. 1930년 말에는 경성지회 의안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신간회는 1931년 5월 전체 대회를 열어 해소안이 가결됨으로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1931년 6월부터 1933년 9월까지 만 2년이 넘게 만해는 얼굴이 반쪽이 되도록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이끌어 갔다. 신간회가 무너진 상황에서 자신이 본령인 불법과 활동 근거지인 불교계를 통해 민족운동 사회운동을 계속해나가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즈음 만해는 식민지 통치하의 민중의 삶, 20년대 이후 사회주의 확산, 신간회 경험, 불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불교 사회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불교의 골자가 평등과 무소유라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재래의 불교는 권력자와 합하여 망하였으며, 부호와 합하여 망하였다. 원래 불교는 계급에 반항하여 평등의 진리를 선양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권력과 합하여 그 생명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원래 불교는 소유욕을 부인하고 우주적 생명을 취함으로써 골자를 삼지 아니하였겠는가”(1931)

만해는 1931년 11월 <<삼천리>> 잡지와 대담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했다.

문 : 석가의 경제사상을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답 : 불교사회주이라 하겠지요.
문 : 불교의 성지인 인도에도 불교사회주의라는 것이 있습니까?
답 :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사회주의가 학설로서 사상적 체계를 이루고 있듯이 불교사회주의가 있어야 옳을 줄 압니다. (1931년 11월 잡지 삼천리 대담)

1933년 55세 때 단성사 옆에 자리한 진성당 병원의 간호원 유숙원과 결혼하였다. 나이는 서른여섯이었고 충남 보령 출신이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택호는 심우장이라고 지었는데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조선총독부 쪽을 바라보기 싫다고 남향을 피하여 동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이 집에서 1934년 9월 1일 딸 한영숙이 태어났다. 호적이 없었으므로 호적신고를 할 수 없었다. 또 학교를 보낼 수도 없었다. 그는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하였고, “왜놈의 학교에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고 하며 집에서 어린 딸을 직접 가르쳤다.

또 1936년에는 단재 신채호의 묘비명을 썼고, 1937년에는 옥사한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의 유해를 모셔다 5일장을 지냈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총독부가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나서자 박광, 이동하 등과 창씨개명 반대 운동을 벌이고, 1943년에는 조선 청년의 학병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3년 겨울 눈을 쓸다가넘어져 반신불수로 고통을 겪던 만해는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입적하였다. 동지들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을 모셨다.

만해가 죽고 나서 정인보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조선의 청년들은 만해를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고 하였고, 홍명희는 "칠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 아는 것보다 낫다"고 추모하였다.

 

ㅇ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연대의 힘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다음날 만공은 무궁화 꽃 봉오리에 먹을 묻혀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글씨를 썼다. 만공탑에 가로로 쓰여진 바로 그 ‘세계일화’였다. 그 뜻은 “세계는 한 송이 꽃이라는 말이니,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인 것이다.”고 하였다.

만해도 1931년에 이와 비슷한 ‘나와 너’를 쓴 적이 있다.

“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 없으면 나도 없다. 나와 다른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나도 아니오.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으면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도 없다. 나는 다른 것의 모임이요. 다른 것은 나의 흩어짐이다.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오, 없는 것도 아니다. 갈꽃 위의 달빛이요, 달 아래의 갈꽃이다.“(1931)

만공과 만해의 이런 생각들을 신자유주의 맞서는 굳은 연대,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나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실천으로 다시 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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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 게시일 : 2015.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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