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순1963년생

비 오는 날 이바구

횃대 1 1,304


비 오는 날은 기실 썰풀기 보다 흐덥한 막걸리 한 잔 새끼 손가락으로 휘 저어서
턱주가리에 칠칠 흐르도록 마시고 파전 도탑하게 구워 나무젓가락으로 뚜욱 띠 먹고는 담배 한 대 피워물고 눈풀기가 더 제격인데.
그렇게 눈 풀어제끼고 속눈썹 위에 담배연기 오링으로 만들어서 주워 얹기 놀이같은
고난도의 연기를 펼치다보면 옛생각 저절로 나재요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삼남일녀를 둔 아버지가 있었어.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는 다들 일하는게 그랬자나. 이 아부지도 와서 배운 기술은 없고 공부도 많이 못한지라 그륵장사를 했재요. 자 한 잔 받아 보시게, 요기 오징어 뒷다리살 얹힌 부분을 띠먹어 딴데 먹지말고..올치를. 그것도 넘의 살이라고 맛이 더 낫네그랴

지금에사 양은그릇 잘 쓰지도 않지만, 그거 빵구 났다고 떼워쓰는 사람도 드물고 고물로 값쳐서 새그륵 받아 가는 사람도 없지 아매, 눈씩고 봐도 없을겨.
이 아부지는 니야까에 그릇을 싣고 낡은 고무가방에 손 때묻은 장부를 끼고 일을 나가요. 그륵 도매상이 대구 범어시장 안에 있었지. 동네방네 니야까를 끌고 다니면서 아지매들이 가져오는 빵구난 냄비를 부랄저울에 달아서 근대수 쳐서 고물값으로 주고 새 그륵으로 바꿔주는거야. 옛날에는 플라스틱이 드물고 귀했지. 스뎅은 더더욱 귀했고. 무쇠로 솥걸어 밥 해묵다가 양은솥이라는 알루미늄이 나왔을 때 그륵은 또 한번 혁명을 겪었다고 나는 보걸랑.
가볍기는 물론이거니와 연탄불에 얹어 놓으면 얼매나 화그르륵 잘 끓어 오르냔말이지
학교 앞에 냄비우동이란 것도 아매 그 양은냄비가 나오고부터 생겼을겨. 지금도 스뎅이니 내열냄비니 해싸도 라면 끓여 먹는 건 양은냄비가 최곤기라. 어이쿠 이야기가 딴데로 샜네. 어? 이사람아 술잔이 비었잖아 한 잔 더 받게.

이 아버지가 첨에는 엄칭이 열심히 일했지. 날마다 외상장부의 두께는 두꺼워져가고 일년부어 오십만원쯤의 산통도 그의 아내는 알뜰히 부었더랬지. 그러다 이 아부지가 살살 노름을 배우기 시작했어. 지금은 뭐 고스톱이란게 있지만 그때는 나이롱뻥이 제일 대중적이였어. 마산에서 온 아재가 이 아부지한테 노름을 가르쳤지. 혼자가기 뭣하니까 꾀인거야. 노름판이란게 그렇찮아 전부다 넘으 돈 공으로 먹을라고 눙깔을 시뻘겋게 해가지고 설쳐대니. 밑천 다 떨려 옆에서 구경하면 무르팍이 녹아내리도록 치는 사람들은 모두 등신같아 보이지. 그래도 막상 지전 꼬불쳐 놓고 쳐보면 그게 어디 맘대로 되나? 전부 도둑놈 심보로 덤비드는데. 아따 이사람에 이야기만 듣지말고 내 잔도 좀 채워주게나. 술상 메너가 뭐 이래. 이젠 따루라말어라 말할 것도 없네 그려 내가 이 술상에 탁배기사발 '탁'소리 나게 놓으면 한잔 채워놓게. 이야기를 어디까지 했지? 맞어...

나이롱뻥 할 때까지는 어제 잃은 밑천 오늘 따오는 식으로다 근근히 현상 유지를 해갔지. 날밤 까는 거야 한 달이면 보름을 그걸로 채웠지. 내 여직 살았지만 노름으로 부자 됐다는 위인 못봤네. 이 아버지도 나이롱뻥에서는 그럭저럭 유지되던 것이 굿삐라는 것을 배우고는 사정없이 무너진거야. 그건 판돈 규모도 크고 갈수록 타격은 컷더랬지. 집구석에는 자슥놈이 아파서 풍선처럼 얼굴이 부풀어도 노름에 미치면 처자슥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결국 대구바닥으로 이사나와 어디 한군데 발바닥으로 밟지 않는 땅이 없이 벌어 놓은 얕고 얕은 돈들을 빚으로 날렸지. 그래도 가끔은 이런 때도 있었지. 어이 자네도 술잔이 비었네 내 말하지 않았는가 탁배기그륵 탁 소리나게 놓으라고. 자....받게

일요일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을 때, 이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같이 그륵장사 길에 나가기도 했다네. 오르막이 나오면 두 아이는 조막만한 손으로 아버지의 니야까를 밀었지. 여름 날, 혼자 끌고 가는 오르막길보다도 어린 두 자슥이 밀어 주는 생의 짐은 조금 더 잘 굴러갔겠지. "너희들이 밀어주니 이 에비가 훨씬 수월타"이런 말도 뒤돌아보며 어린 자슥들에게 했으리라. 그리고 집 짓기 위해 사둔 효목시장 뒷편 마흔평 땅뙈기를 보여주며 이 땅에 집을 짓고 잘 살자..이런 뿌듯한 마음도 자슥놈들에게 안겨 주었으리라. 그런데..사람살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회오리 바람이 불어와 눈물과 피땀으로 담아 놓은 것들은 우습게 날려버리거등. 어린 자슥들 눈망울에 희망의 꽃불로 피어나던 것들이 소리도 소문도 없이 꺼질즈음.



사람의 일이란 알 수가 없네.
견뎌서 못 견디는 일이 어디있겠는가. 어제는 이 아부지의 삼남일녀가 다 모였다네
모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제 짝과 이쁜 자슥들을 무르팍에 앉히고 밥을 먹고 술을 한 잔씩하면서 옛날 이야기를 한다네.
피오줌을 누어서 쓴 옥수수 수염물을 죽을 맛을로 들이키던 큰아들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서 꿈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아버지에게 술을 따뤄 드리고, 수학여행 다녀오니 식구들이 이사를 가서 늦은 밤 홀로 물어물어 이사간 집을 찾아가던 그 집의 장녀도 아비에게 술을 따뤄드리고......
아무도 슬프지 않는 밥상 앞에 앉아 아버지의 십팔번노래 유정천리도 목소리 맞춰부르면서.



얼래? 아지매요. 여기 술주전자 다 비있다. 막걸리 한되 더 주소. 찌짐도 한장 더 부치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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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상화
엇따,  먼 이바구를 술 따르다 말드시 한다요?  감질나게시리.  그 술주전자 내 채워드리고 얘기 마저 듣고 싶구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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