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순1963년생

세월의 모양

횃대 3 1,789

 

우리집 옆 골목을 지나 일호씨 대문 앞으로 쭈욱 내려가면 복개된 길이 나온다. 거기에 이명자 교장선생님이 사시지를.  칠순이 넘었으니 이미 교장직에서는 오래 전에 퇴직을 하셨다. 그래도 열정적으로 황간성당의 신도협의회 일을 맡으셔서 종횡무진 차를 끌고 다니신다. 그 집에는 이명자샘 언니도 같이 산다. 이름 하여 수야 이모.  교장 선생님의 아들 이름이 현수이니 수야 이모 맞다.

 

수야 이모도 언제적에 여든의 연세를 훌쩍 뛰어 넘었다. 나만 보면 시어른 모시고 사느라고 얼마나 힘드느냐고 내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해준다. 나는 그렇게 위로 받을 만큼 어렵게 시부를 모시고 사는게 아니여서 그런 소릴 들을 때마다 조금씩 민망하다.

 

그 수야 이모 할머니가 하루는 오토바이 타고 가는 나를 불렀다. 혹시 시루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시루야 우리집에도 있다. 쌀 되가웃은 부어 떡을 쪄도 넘치지 않을 만큼한 크기의 질시루.

어머님 계실 때는 달달이 차 고사를 지내느라 그 시루에다 떡을 쪘다.

붉은 팥을 삶아 물기 없게 포슬포슬 뜸을 들여 하루 낮을 식혀서 도구통에 넣어 대충 쿵쿵 빻아주면

팥알이 남은 둥, 부서진 둥하는 푸슬푸슬 팥알이 딩굴딩굴하는 고물이 완성되었다.

저녁 열시가 넘어가면 낮에 빻아 둔 쌀과 고물을 켜켜로 앉혀 시루를 김오르는 솥 우에 앉혔다.

밀가루를 서너 숟갈 덜어서 되직허니 반죽을 해서는 시루와 솥 사이에 김이 새 나가지 않게 번을 발랐다.

떡을 다 찌고 난 뒤에 마르며 익은 밀가루 번을 칼로 떼면 빵처럼 구워졌다. 소금기도 단맛도 없는 밀가루 맛의 번.

어머님 돌아가시자, 이월 영동 할머니 맞이하는 고사도, 유월 유둣날 논에 떡 갖다 넣는 일도, 칠석날 밥 해먹는 일도 시월 상달 가을 고사도 모두 접고, 더불어 달달이 지내던 차고사도 끌어 묻었다. 그러고는 우리집 냉동실에서 붉은 팥고물을 얹은 시루떡도 사라졌다.

달달이 한 밤중, 땡! 열두시 종소리와 함께 치러 내던 그 행사를 준비하면서 내가 정성으로 했다면 다~~아 개뻥이다.

할 때마다 그런 고사가 귀찮기도 하고 소용없어 보이기도 해서 입이 닷발이나 튀어 나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어머님 가시고 두 해 지나고 나니, 제사든 집구석 행사든 내 맘대로 주무르게 되었다.

맹글기 까다로운 음식은 은근슬쩍 생략도 하고, 법도에 맞지 않지만 다들 잘 먹으면 그걸로 슬쩍 대체도 할 만큼 나의 권한은 커졌다. 번 방앗간에서 한 두되씩 하던 떡도 과감히 줄여 마트에서 한 접시 분량만 사서 달랑 올리기도 한다. 세상에 편하고 좋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거 떡 앉히기 졸업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수야 이모가 시루를 하나 준다는데 귀가 솔깃해졌다.

받아보니 오래 된 시루다. 수야 이모의 엄마의 엄마가 썼을지도 모르는 이 시루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추수하고 가을떡을 해먹었지.

처음 찧은 쌀로 성주동이와 터주동이에 새쌀을 갈아 넣고 갖은 햇곡식으로 떡을 쪄 조상신에게 감사제를 지냈더랬지. 가을 고사 지낼 땐 날조차 쌀쌀하여 이른 아침절에 시루를 씻어다 보자기에 싸서 방 안 아랫목에 놓아 두었다. 

 

시루를 깨끗하게 씻어 마른 행주질을 하고 마루로 가져왔다.

아직은 험하게 딩굴은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다.

시루를 닦다가 문득 시루의 손잡이가 눈에 들어왔다.

적당한 크기의 흙을 떼다가 얇지도 두껍지도 않게 손으로 조물락조물락 매만진 백 년도 더 전의 도공의 손길이 화악 눈 안으로 들어온다.

밋밋하지 않게 두 줄 선을 두르는 일도 한가지 공정이 더하는 일일텐데 그 미학도 포기하지 않았다.

저런 손길, 투박하지만 마음이 들어 있는 그 시절의 이름 없는 한 사람을 생각하자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 세월은 어떻게 쌓이고 내 곁에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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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상화
우리집에서 시루가 사라진 건 할머니와 함께였습니다. 할머니께서 시루를 갖고 가시면서 떡도 사라지고,  시집올 때 가지고 오셨다던 1914년 경기도 용인제 무쇠가새도,  쌀되나 주고 바꾼 백동비녀도...
김영철
벌교에는 옹기그릇도 많이 구웠어요  옹기는 물 독아지하고 시루가 제격 이었지요 이제 다 부서지고 없어요 시루 밑에 까느것을 뭐래더라? 가물
하네요  손잡이가 예사롭지 않네요  잘 보관 하세요
배순덕
어머님 돌아가시고 남의 땅에 지은집이라 별 미련없이 모든걸 버리고 왔는데 돌이켜보면 장독 못 챙겨온게 늘 걸립니다.
객지나간 자식들 그리움이 차곡차곡 담아두었던 장독안, 철없던 며느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깨닫습니다. 헌신적인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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