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순/ 1963년생
포도 알솎기를 하다보면 지랄병이 도진다
포도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알이 꽉 들어벡힌 것을
죽은 자슥 부랄 만지듯 요리조리 만지고 뜯어보며 꽉 벡힌 것의 알을 솎아 내는 것이다.
그렇게 세심하게 노려보고 꼬라보고 돌려보고 어루만져 모양을 잡으면 포도 한 송이 알솎기가 완료된다.
천평도 채 안 되지만 포도밭에 포도송이는 몇 송이?
내 속에서 솥갑증이 일며 지랄이 풍년송을 부른다.
그러나 이 일은 끝이 있는 일, 마지막 한 송이 하고 난 뒤
솎음가위를 밭고랑에 집어 던지며 장화를 벗을 때의 고매한 자유!
(고매한`이란 단어를 쓰니 문득 저세상에 간 취생이 생각난다)
마지막 한 고랑만 하면 되는데 오후에 빗방울 들이친다. 얼씨구나 술퍼클럽 회원에게 전화를 한다.
젊은 술퍼회원 하나가 이미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단다,워디여?
덕산 식당!
몇 년 전, 우리 동네 병일이아저씨가 어데서 여자를 하나 델고와서 몇 년 살았다.
그 여자는 딸하나를 델고 왔는데 그 다음해엔 친정엄마까지 델고 왔다.
들리는 소문에 몇 년 농사 지은거에 아저씨가 암 걸려 받은 보험금까지 알뜰히 알게 먹고는 다시 갈라섰고,그 돈으로 역전 올라가는 허름한 가게에다 덕산식당 간판을 내걸었다.
우산을 접어 빗방울을 훽 뿌리며 파리방지 비닐주렴을 밀치고 들어간다
말 술 받아 주전자에 담아 파는 곳인가보다 흔한 허연 막걸리통이 아니고 노란 양은주전자다
찌그러져야 제 맛인 막걸리 주전자.
"아지매, 여게 막걸리 한 되 더 주소!"
포도일 어지가히 하다가 해가 저물면 술 생각 지절로 난다.
심심촌빨 날리는 촌 여편네의 셀폰이라도 전화 번호는 사백여개가 넘는데,그녀르꺼 맘 편히 술 잔 주고 받을 사람없다. 불러 낼 사람이 없는게다. 어데서 누구랑 술 먹더라라는 소문은 바퀴벌레가 도망가는 것보다 더 빨리 동네에 퍼진다. 그래서 참고, 참고, 또 참는다. 참다 참다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은 나도 모르게 술을 찾아 길을 나선다. 땅이 빗물을 받아 들이는 것처럼 나는 내 몸에 술을 받아 들여야할 비장한 사명감이 마구마구 솟아 난다.이 정도면 술꾼 맞지 않나?
막걸리 다섯 대지비에 정구지지짐 한 장이면 해갈이 되는데 그걸 못해....젠장